Screwtape Letters

music in light 빛의 음악

 

in a cool breeze of light

I seek joy

walking through maze of dreams

looking up

I find myself looking down

surface fiddled

by cool breeze of light

loose myself

fear desperation humiliation

puzzled that I is not not I

in a cool breeze of light

it happens again

but what happens before

is not what I remember

when it happens again

 

올려다보니

수면 위로 나를 내려다 보는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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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DEO ]

 

 

 

 [ PRESS ]

 

빛의 음악 Music in Light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

 

작곡가 이신우와 설치미술가 배정완의 공동예술작품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피아니스트 박종화의 연주를 통해 관객을 만난다. 서울대학교 미술관 MoA에서 9월9일~30일까지 전시, 공연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작곡가와 연주가, 미술가라는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상호간의 예술적 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만들어가는 복합적 예술작품이다.

 

프로그램

 

# 시원한 및 Cool Light

# 그 길고도 어둑한 몽상의 미로 In the long, dim labyrinth of severies

#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Go away Loard; I am a sinful man!"

# 갑옷처럼 인간의 온몸을 둘러싼... Building up the finest armour around a man...

# 절망과 공포와 당혹감이 넘치는 산 술잔 A brimfull living chalice of despair and horror and astonishment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Woe to me! I am ruined!"

# 순결한 및 Pure Light

# 그리스도의 십자가 The Cross of Christ

# 영원한 즐거움 Pleasures for evermore

# 오직 생명만 있는 곳, 그리하여 음악 아닌 것은 모두 침묵인 곳 The regions where there is only life and therefore all that is not music is silence

 

‘숭고’의 또 다른 해석,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대하여

 

현대의 음악이나 회화, 조각 등 이른바 현대예술이 주는 당혹감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현대예술, 우리 눈이나 귀에 즐거움보다는 충격을 주는 현대예술. 이를 20세기의 철학자와 미학자들은 ‘미’가 아닌 ‘숭고’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려 한다. 즉 미의 미학에서 숭고의 미학으로 옮겨갔다는 해석이다.

 

전통적으로 추구되어온 조화, 비례, 균형, 다양성 속의 통일 …. 이러한 미의 규범은 더 이상 현대예술가들의 중요한 화두가 아닌지 오래다. 한계 지을 수 없는 것 앞에서 일종의 신성한 공포를 느끼며 만물에서 질서와 비례를 찾고 또 부여하려 했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전통이 고전미의 뿌리가 되었다면,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그림이나 조각이 가진 거대한 크기와 과도한 단순함은 그러한 미적 규범을 넘어선다. 보는 이가 작품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에 의해 관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관객의 지각의 범위를 넘어서서 관객을 압도하는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나 추함의 범주 안에서 설명되기 어렵다. 뉴먼 자신을 비롯해 몇몇 이들은 이로부터 숭고를 읽는다.

 

그런데 ‘숭고’(영어의 the sublime, 독어의 das Erhabene, 불어의 le sublime)라는 것은 사실상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이슈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서양의 고대로부터 조금씩 변화하는 의미 속에 존재해온, 상당히 역사적인 개념이다. 숭고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이로 알려진 고대의 위(僞)롱기누스(Pseudo-Longinus)는 “예술작품의 창조자와 향유자 모두의 감성적 참여를 끌어들이는 위대하고 귀족적인 열정의 표현”이자 “청중이나 독자들을 무아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어떤 것”으로서 숭고를 설명한다.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지 설득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고 믿는 롱기누스에게서 숭고는 예술의 효과와 연관되며, 그는 예술을 통해 숭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후 18세기에 이르러 숭고는 예술로부터 자연으로 그 영역이 옮아간다. 무한한 밤하늘, 끝없는 심연, 가없는 드넓음, 거친 바위, 캄캄한 동굴, 굉음 속에 내려치는 폭포… 이처럼 광대한 자연은 매혹적이면서도 두렵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와 숭고를 명확히 구별해 정의하려 한 칸트는 무한한 공간이나 크기로부터 느끼는 숭고를 ‘수학적 숭고’, 그리고 무한한 힘으로부터 느끼는 숭고를 ‘역학적 숭고’라고 구분했다. 그는 또 다른 기준에 의해 숭고를 공포의 숭고함, 고상한 숭고함, 화려한 숭고함으로 나누기도 했다. 그가 미에 대해 말한 내용을 보면 위에 언급한 뉴먼의 작품이 미와 추의 영역에서 벗어나있음을 한편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아 보인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능력에 적합하게 생긴 대상이나 형태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낀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무한한 대상이나 힘으로부터는 미가 아닌 숭고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뿐 아니라 근대미학에서 미와 숭고를 구별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을 보다 직접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연결시킨 이도 있었다. 이미 17세기말 토마스 버넷(Thomas Burnet)은 “산악체험에는 영혼을 하나님께 고양시켜주고 무한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며 위대한 사상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런가 하면 위험과 죽음, 폐허와 공포가 유발할 수 있는 쾌(快)에 관련해 숭고를 말한 이도 있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고통과 위험 …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 숭고의 근원”이며, 이러한 것은 영혼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한 감정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열거한 다양한 의미의 ‘숭고’에 있어 공통적으로 흐르는 것이라면, 인간의 지각과 인지의 한계를 넘어서며 이성적 기준을 벗어나는 어떤 초월적 대상, 초월적 힘에 대한 두려움과 경이의 감정, 즉 일종의 종교적 경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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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와서 자연이 아닌 예술을 통해 다시 숭고를 말하기 시작한 철학자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이다. “모더니즘은 숭고하다”고 말하는 그는 바넷 뉴먼의 예를 통해, 더 이상 광활한 자연 속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나 힘이 아니라 현대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효과,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체험하는 당혹스러운 쾌감을 숭고로서 설명한다. 전통미술에서와 달리 어떤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극도로 단순화된 뉴먼의 형태와 색채에 대해 리오타르는 ‘묘사될 수 없는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숭고함이라고 일컫는다.

 

필자는 작곡가 이신우와 설치미술가 배정완의 공동예술작품인 본 공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는 중요한 하나의 코드로서 ‘숭고’를 제시하려 한다. 무한하기도 유한하기도 한 시간과 공간 속에 울리는 선율과 화성, 피아노의 음색, 그리고 거대한 공간을 감싼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와 우레탄,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이라는 물리적 재료들 뒤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한 가지 정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바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압도하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외부의 사물을 묘사하지 않은 채 추상적 형태와 빛을 통해 설치된 배정완의 작품을 바라보는 데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겠으나, 뉴먼의 작품을 “묘사될 수 없는 것의 부정적 묘사, 즉 숭고의 부정적 묘사”로 보는 리오타르의 해석은 배정완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도 꽤 유효한 듯하다. 물론 배정완의 색채와 형태는 단순하지 않다는 점에서 뉴먼의 작품과는 다르다. 그래서 숭고―20세기에 다시 대두된 ‘예술’을 통한 숭고―의 ‘또 다른’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편 이신우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숭고는 이와 또 다르다. 그의 음악은 어법이나 양식적으로는 전통적 서양예술음악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전통적 미에서 벗어나 충격과 당혹감을 주는 현대예술의 외양과는 차이가 있다. 이신우의 음악이 품고 있는 것은 보다 기독교적인 숭고함이다. 절대자 앞에서의 두려움과 경외감. 절대선(善)과 절대의(義), 전지하며 전능한 신(神) 앞에 선 한 피조물로서 느끼는 숭고이다. 앞서, 산악체험을 통해 영혼이 하나님께로 고양된다고 말했던 토마스 버넷과 통한다고 해도 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음악으로 울리게 한다는 점에서 ‘숭고의 부정적 묘사’와의 연관도 볼 수 있다. 현대조형예술에서 ‘재현의 파괴’를 통해 숭고가 존재할 수 있다면, 음악은 본디 무언가를 재현함에 부적절하다는 한계이자 특색을 지닌 예술로서, 대상을 묘사하지 않고 재현하지 않는다는 현대적 숭고의 미학과 맞닿아 있다. 이는 이신우의 음악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텍스트와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그의 음악은 이 텍스트를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으며, 음악예술 고유의 방식과 기법으로 이를 음악화 하고 있다.

 

1시간여 동안 연주되는 음악은 전체 10개의 소곡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 소곡의 제목은 C. S. 루이스의 저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 및 성경에서 따온 글귀들로 되어있다. 루이스는 영문학자이자 작가일 뿐 아니라 20세기의 탁월한 기독교사상가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을 보여준 인물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그의 대표작에 속하는 것으로, ‘스크루테이프’라는 가상의 악마가 신참악마인 조카에게 보내는 31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일종의 픽션이다.

 

이 제목을 빌어온 본 공연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깊숙한 고뇌와 구원, 절망과 생명이라는 주제를 언어가 아닌 음악과 빛과 조형을 통해 섬세하게 접근해가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미 수년전부터 음악을 통해 신앙과 인간에 대한 성찰에 다가가는 작업에 몰두해온 작곡가 이신우, 그리고 빛과 색채, 소리가 결합된 다원적 작품을 여러 차례 선보인 바 있는 미술가 배정완의 만남은, 음악의 한없는 깊이를 보여주는 역량을 지닌 피아니스트 박종화의 탁월하고 심원한 연주를 통해 더욱 빛을 발하리라 기대한다.

 

“숭고함이 주는 모든 감동은 아름다움의 황홀한 매력보다 더욱 매혹적”이라는 칸트의 말은, 약 한 세기 반 후 “일체의 미(美)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 숭고”라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을 통해 확언된다. 인류의 오랜 시간동안 ‘미’와 대비되어, 또는 단순한 미를 넘어서서 사유되고 존재해온 ‘숭고’의 또 하나의 예술적 해석을 관객으로서 맞이하는 것은 두려움 속의 기쁨이다.

 

(글: 서정은)